리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

이번에는 감리교 선교신학자 필립 미도우즈Philip R. Meadows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와 훈련’Mission and Discipleship in a Digital Culture에 대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미도우즈는 ‘전도와 제자삼기’, ‘선교적 교회론과 교회개척’, ‘오늘의 문화 속에서 선교하기’, ‘웨슬리 신학과 영성’의 전문가이며,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선교 참여와 서구의 세속화 문제 등에 대한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최근의 발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웨슬리 DNA의 훈련: 21세기 교회를 위한 훈련의 새로운 표현들
    The Wesleyan DNA of Discipleship : Fresh Expressions of Discipleship for the 21st Century Church (Grove, 2013)
  • 세례를 기억하라: 웨슬리 영성의 훈련과 선교
    Remembering Our Baptism : Discipleship and Mission in the Wesleyan Spirit (Discipleship Resources, 2017)
필립 미도우즈 박사

이 논문에서 미도우즈가 분류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경향성은 현대 코비드19로 인한 언텍트 사회와 목회에 적용할만한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변혁의 파장을 ‘수렴의 관점’perspective of convergence에서 선교와 훈련의 방향으로 재정립할 것을 이 논문에서 그는 제안합니다.

수렴의 관점

저자는 새로 부상하는 디지털 문화가 낡은 미디어(또는 디지털 이전의 방식)을 완전히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디지털 혁명’의 관점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것과 낡은 것, 디지털 미디어와 전통적 미디어가 전례 없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수렴(융합)할 것이라는 젠킨스Jenkins의 의견에 그는 동의합니다.
(수렴의 문화: 새 미디어와 낡은 미디어가 부딛치는 곳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칸 아카데미에 소개된 수렴에 관한 설명

그래프를 보면 x축 위에서 접근하는 선과 아래에서 접근하는 선이 점점 0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도우즈에 의하면 ‘수렴의 원리’principle of convergence란 ‘인간의 삶(관계들와 공동체)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다양한 전통들과 관행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미디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일상생활)로 점점 가까워져 융합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일상생활이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 일터에서의 협업, 여가시간의 사용, 쇼핑, 세금 납부, 정책 결정 참여 등과 같은 방대한 영역, 방식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들을 의미합니다. 이 논문의 목적은 1)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디지털 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약속인지 함정에 불과한지를 살펴 보고, 2) 선교와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광범한 (디지털 문화의) 의미들(암시들)을 탐구해 보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데이빗 벨의 디지털 문화론

저자는 데이빗 벨David Bell의 ‘사이버문화 개론’An Introduction to Cybercultures에서 소개한 물리적, 상징적, 체험적 설명을 소개하여 ‘디지털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습니다.

1 물리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물리적 설명은 컴퓨터와 디지털 장비와 인터넷의 기원과 발전과 활용으로 오늘의 일상 생활은 점점 더 디지털 미디어의 ‘가상 영역’virtual realm에 잠겨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접근방식들은 주로 도구들, 양식들, 기능들에 집중하며, 모든 곳을 둘러싸고 있는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 가정과 일터와 노동과 여가의 상호연결interconnecting의 패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디지털 네트웍들이 현대사회의 주요한 조직 모드가 되고 있다.
    (판 디에크Van Dijk의 ‘네트웍 사회: 새 미디어의 사회적 측면들’Network Society: Social Aspects of New Media).
  • 소셜 미디어가 전통적인 사회관계들을 대체하는 현상.
  • 아바타avatar가 가상 공간에서 취직도 하고, 땅도 사고, 집도 짓고, 교회도 가고, 결혼도 하고, 정착도 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관한
    (팀 게스트Tim Guest의 ‘제2의 인생: 가상 세계로의 여행'(Second Lives: A Journey Through Virtual Worlds).

수렴의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공간에 거주’ 는 가상 네트워크가 대화식으로 일상 생활의 흐름에 접해 있는 생활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포스트 데스크탑’ 세계에서 가상공간cyberspace는 ‘저 밖에 있는’ 비현실적인 영역이라기 보다는, 광범한 정보 교환과 사회 관계들을 위하여 디지털 장비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일상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2 상징적 접근

디지털 문화에 대한 상징적 설명은 소설과 예술과 영화를 통하여, 우리와 기술의 관계를 상상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그 유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트루먼 쇼우Truman Show와 매트릭스Matrix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과 사회가 융합되어, 배후의 사회정치적 세력들이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현체제status quo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길들인다는 이야기들.
  • 우주 여행Star Trek과 이백년의 사람Bicentennial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몸이 융합되어, 디지털 임플란트와 로봇 보철, 핸드헬드 컴퓨터와 블루투스 이어폰, 유전공학, 노노 기술, 로봇 공학의 개발을 통해 인간 유기체에 가까워진 기술,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 트론Tron과 잔디깎는 사람Lawnmower Man에 나오는 것 같이, 기술과 생각이 융합되어,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거나 디지털 기술로 낚아채어, 우리 생각(마음)의 소프트웨어를 우리 육체의 ‘웻웨어'(wetware, 기계를 뜻하는 하드웨어에 비하여 우리 몸을 가리킴)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

이런 상징적 질문들을 통하여 디지털화된 포스트 모던 사람들은, 기술적 숙달과 조작의 환상을 넘어서는 진짜 자아, 진짜 관계, 진짜 공동체 같은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3 체험적 접근

디지털문화에 대한 체험적 설명은 ‘원격 대면’telepresent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어딘가에 또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의 가치를 이러한 ‘원격 대면’의 체험이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아무리 원격 대면의 기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맛 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구체적인embodied 친구와의 대면을 대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매체가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재(외로움absence)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주고, 시공의 한계들을 넘어 풍부한 체험들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텍스트, 트윗, 현재상태 업데이트등의 스트리밍 문화에 떨어지지 않고 주의글 기울이려는 사람들 사이의 체험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항상 켜져 있음’의 중독과, 얼굴을 대면하는 심도 있는 만남의 대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들에 대한 미도우즈의 요약은 이와 같습니다.

요약하면, 디지털 문화는 일상 생활에 가상적 차원을 추가합니다.

한 편으로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구체적(현실의) 관계들을 여러 측면에서 향상시키고 확장시켜 주지만, 우리의 삶을 여러 다른 영역들로 분리시켜 구획화compartmentalize 시켜 버리거나, 가상의 생활 그 자체를 목적(주객전도)으로 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디지털 매체의 분리하는disembodying(구체적 형태로부터 자유롭게하는) 효과는 우리의 가상적인 삶에 엄청난 자유와 유연성을 가져다 주지만, 설득력 있는 ‘시뮬레이션’ 뒤에 중대한 손실들을 은닉하고, 온전한 인간 관계들에 덜 정착하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이 ‘구획화’와 ‘분리’의 긴장들은, 성육신하신 구세주의 모본을, 온 삶으로, 선교하는 제자mission-shaped disciples로서 따르려는 이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제기합니다.

디지털 문화 속에 거주하기

디지털 원주민과 이주민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에 대한 위와 같은 디지털 문화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을 분류하는 데에 미도우즈는 프랜스키(Marc Prensky,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Digital Natives, Digital Natives)의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에 대한 문화적 연구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타고나면서부터 디지털’born digital일 수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토착화된inculturated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선교학적으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대한 입장을, 디지털 외계인digital alien, 디지털 선구자digital pioneer,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미도우즈에게 독특한 것은 이 세 가지 경향성이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상호 모순되면서도 상존하는 양가 감정 또는 태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1 디지털 외계인

이들은 무비판적인 기술의 도입에 대해, 성서적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합니다.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요한 이야기들은 성서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는 매우 ‘전통적인’, 디지털 이전pre-digital 뿐 아니라 근대 이전pre-modern한 생활 양식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매개체로서, 주변 백성들로부터 구별하여 부른 거룩한 백성의 형성을 통해서, ‘몸으로’in the flesh 하느님 현존의 실재reality와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에게 성서적 교회란 함께 직접 빵을 떼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더불어 사는 것을 체현하는 성육신은, 가상의 형태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미도우즈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물리적으로 모인다는 것이 그렇다면 서로가 진정 현존really present(서로를 진정으로 느끼는)을 보증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같은 곳에 머문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적 뿌리는 실제 영역이나 가상 영역 모두에 뻗어 있어,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약화시킵니다.

2 디지털 파이어니어

이들은 전도와 훈련과 공동체를 탐험(실험)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전통적’ 표현들은 디지털 기술들과 상호작용에 매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서적 그리스도교가 현실과 가상의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디지털 외계인이 디지털 미디어의 힘이 우리의 제자도를 잘못구성mis-shape한다고 저항한다면,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은 디지털 미디어의 힘을 장악하여 우리의 사역을 재구성re-shaping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가상 교회의 다양한 실험들을 소개합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디지털 외계인의 입장에서 파이어니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바타가 된다는 것은 성육신한다는 것과 같지 않으며, 복음은 전송하기 편한 비트와 바이트의 정보로 디지털화 할 수 없다는 점, 가상의 복음은 편하고 안전하고 즉각 접할 수 있는 상품commodity으로 왜곡되어, 포스트모던 개인주의의 갈망들을 살찌우며, 영성을 내적 종교 체험의 추구로 축소시키고, 사목을 개인의 영적 여정을 위한 가상의 사역chaplaincy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 교회에 대한 비판은 전통적 교회에 거울처럼 반사시켜, 제자도 전반in general(전통적 교회를 포함하여)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는 오래 앓아 온 역병과 같은 문제였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가상의 교회가 실재 교회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고, 가상의 교회가 전통적 교회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보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자도와 공동체의 표현들을 함께 풍성하게 해 줍니다.

3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외계인이 실재embodied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가 가상virtual 공동체의 잠재력을 강조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은 양자(실재와 가상)를 통해 표현되는 영적 우정의 네트웍에 소속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몇 권의 참고 도서를 권해 주고 있습니다.

  • 아담 토머스Adam Thomas, 디지털 제자: 가상 세계 속의 진짜 그리스도교Digital Disciple: Real Christianinty in a Virtual World.
  • 엘리자벳 드레셔Elizabeth Drescher,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트윗하세요: 디지털 변혁 가운데 교회를 실천하기Tweet if You Love Jesus: Practicing Church in the Digital Reformation.
  • 제시 라이스Jesse Rice, 페북 교회: 초연결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있나How the Hyperconnected are Redefining Community.
  • 렉스 밀러Rex Miller, 새천년 매트릭스: 교회의 과거를 되찾고 미래를 다시 구성하기The Milenium Matrix: Reclaiming the Past, Reframing the Future of the Church.

이들은 가상 교회들이 전통적 표현들을 단지 흉내내기만(시뮬레이션simulate) 한다면 그런 곳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관심있는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디지털 원주민들은, 집에서든, 특별히 마련된 성소에서든, 스타벅스와 같은 만남의 장소든, 페북과 같은 가상의 네트웍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친교(상통)을 위하여 모일 때마다 어떻게 교회가 형성되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연결적인(하는) 공간들’connective spaces로서, 함께 흐를 수 있고, 진짜real 사람들이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와 변혁적인transforming 관계들을 형성하고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디지털 외계인들이 매체에 저항하고, 디지털 파이어니어들이 메체를 재형성한다면, 디지털 원주민의 기본 입장은 매체를 ‘리믹스’remix, 다시 섞어 재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이 리믹스된 관계들에는 실재와 가상의 삶 사이의 구분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flesh이 가상적 관계들을 통해 원격 대면telepresence이 되는가 하면, 원격 대면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모임들을 통하여 육신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매체가 디지털 문화를 위하여 리믹스된다면, 디지털 외계인들은 진짜 상실들이 확신을 주는 시뮬레이션 뒤에 감춰어지고, 일상 생활이 가상 이미지 속으로 재형성되고 말 위험에 대해 지적합니다. 이것이 실재 현실이 방치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실재 사람들이 육신 안에서 초실재hyper-reality의 습관을 을번시킴에 따라, 깊이와 진정성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문화의 위험은 우리가 덜 인격적으로personal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 항구적으로 ‘몸을 벗어난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초인격hyperpersonal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직접 접하는) 이웃들을 위한 얼굴과 ‘항상 켜져 있는’always on(가상의) 관계를 위한 이중적인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서핑을 하면서, 계속 부분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대면하지 않을 위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덜 관계를 맺는 위험이 아니라, 초친밀함hyperintimate, 즉 계속 (때로는 분별 없이) 공중이 소비할 개인적인 메시지들을 과하게 나눈다는oversharing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에 참여하기

저자 미도우즈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것에 관하여 영성, 훈련(제자화), 친교(상통), 전도의 영역에서 분석을 계속합니다. 그의 수렴적 관점에서 보면, 삶의 가상적 차원은, 온전히 현실화된(실재의) 제자도를 대체하기보다는, 증대시키고 확장합니다. 하지만 가상적 생활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으려는 열망은, 소위 ‘진짜 교회’ 안에 내재하는 영적 질병의 증상으로 보입니다. 공허한 예배, 창백한 친교, 엷은 실천들, 진정한 생활의 것들과 단절된 모든 것들은, 영양부족인 영혼들과 영적 의기소침함을 초래합니다.

저자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전개하는 선교의 미래는, 온라인 세계 속에 가상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도, 전통적인 교회를 기술적으로 더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지역 교회가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not making disciples, 기술을 포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추구’가 없다면, 가상 영역에 진짜 증언도, 가상 영역의 유익을 분별하는 것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저자는 영성과 훈련과 친교와 전도의 영역에서 이제 구체적인 분석을 시작하지만, 저의 요약은 여기에서 멈추려 합니다. 리뷰의 글로 시작했는데 자꾸 욕심이 나서 세세한 요약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가 이 논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리뷰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더 자세한 것은 잠시 여러분들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이 논문에는 요약이 담지 못한 생생한 개념정의, 분석, 묘사들과 무엇보다도 풍부한 자료 소개가 있습니다.

코비드19로 인하여 디지털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의 토론과 논쟁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이 때에, 미도우즈의 분석과 분류는 전반을 볼 수 있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원주민과 이 문화에 더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경험들이 어떤 특징과 약점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계속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또 그 반대의 입장들에 대하여 진영이 나뉘는 것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외계인과 파이어니어와 원주민의 경향이 모두의 마음 가운데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악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함께 접근해 가야 한다는 섬세함을 가다듬게 해 줍니다. 물론 이런 논쟁의 가치와 아픈 과정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양심을 한 번 더 기다려 보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디지털 문화의 쟁점을 외부가 아닌, 진정한 훈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제자화에 두고 있는 점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던 이를 더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격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여하려면 어떤 영성, 훈련, 친교, 전도를 하여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하고, 저자의 글을 통하여 함께 더 깊어지기를 바라며 이 소개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

도토리와 세상의 빛

 이번 책가방 축복식 선물은 도토리예요. 동글동글하고 토실토실한 도토리가 참 예쁘지요. 옆에 다람쥐가 같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올해는 대한성공회가 한국에 온 지 130년이 되었어요. 그 옛날에 성공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도토리 나무를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1911년 주교 서품식에 영국에서 보낸 선물을 보면 대한성공회 마크와 도토리 가지가 함께 새겨져 있어요. 대한성공회 마크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 주변에 도토리 나무잎 무늬로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도토리 나무가 이 문장을 디자인 한 분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시 산 위에 올라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도토리 나무, 상수리 나무에서 한국의 자연, 한국의 산과 강에 대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속에서 금과 은으로 장식할 대한성공회의 비전을 떠올린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지네요.

올해 서울교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빛나는 생활을 하기로 하였어요. 그런데 크고 환한 빛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결심과 희망과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도토리 나무가 햇빛을 받아 도토리 한 알 한 알을 열매 맺으면, 귀여운 다람쥐들은 추운 겨울에도 오손도손 마주앉아 도토리를 먹으며 힘을 내겠지요.

여러분도 이 선물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평범한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옆에 있는 사람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좋겠어요. 도토리처럼 작고, 단단하고, 알찬 여러분의 빛을 기대합니다.

2020년 3월 5일 목요일
시몬 다람쥐 올림

기도를 향한 열정 – 사라 코클리

지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새문안교회에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주었던 메시지의 여운은 지금도 잦을 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몇 가지 열쇄말을 이해해야 한다. 

1. 기도와 갈망

한국어 번역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갈망desire을 ‘욕망’으로 번역한 것과, 둘째는 수덕생활asceticism을 ‘금욕주의’로 옮긴 것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번역이 지닌 장점도 있는데, 기도가 인간들의 욕구와 욕망을 배제시킨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온갖 바램과 희망과 허영이 뒤섞여 응어리진 마음을 다 가지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이라는 용어로 담아 낼 수 없는 광대한 영역이 있다. 코클리는 기도를 만유 또는 온 세계를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기도라는 스케일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의 본 줄기라고 한다면 ‘성령의 욕망’ 또는 ‘성령의 욕구’라는 표현 보다는 ‘성령의 갈망’ 또는 ‘성령의 갈급함’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것 같다.

르고 마음 속에 새로운 스파크를 일으킨다. 그의 발표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기도 생활의 광맥을 보여 주었지만, 그만큼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 낯선 개념들이야말로 기도 생활의 영역을 넓혀 주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박사가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움의 강사로 방한하여, 새문안교회에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세 차례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는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한국 교회를 촉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도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과 간구에 참여하는 것이며, 자그마한 파편인 개개인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 주제는 “기도, 욕망, 성: 오늘을 위한 삼위일체론의 재해석”인데, 그것은 크게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기도, 성, 욕망의 상호관계
  2. 삼위일체 교리의 원천인 기도
  3. ‘고전삼위일체신앙과 현대’의 기도, 성, 욕망에 대하여

이 강연을 잘 이해하려면 욕망(갈망), 성, 금욕주의(수덕생활)와 같은 용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욕망desire

욕망desire: 고전 신학에서는 욕구needs와 갈망desire를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욕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세상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갈망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코클리는 기도의 원동력이 갈망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든 바램과 목마름이 결국에는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큰 바램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개인의 욕구와 신적인 갈망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샘이다. 그렇기에 욕망이라는 번역도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용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코클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걸러지지 않은 욕망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하느님 의지에 맡겨 드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검증test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자리 찾기’modulization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깨어진 파편에 불과한 욕망이, 만유를 위한 성령의 갈망을 만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이 기도라는 것이다.

2. 성gender

코클리는 성에 대하여 ‘gender’와 ‘sex’라는 두 단어를 병기하였지만, 이 강의에서 이 두 용어에 대해서 특별히 논한 바는 없다. 나는 여기에서 ‘성’은 사실상 인간의 몸body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음soul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온갖 욕구와 갈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갈망이 ‘영’spirit에 관한 것이라면, 욕구와 갈망이 섞여 있는 인간soul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구체적인 존재이다. 성육신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성이라는 구체성 속으로 임하신 것이다. 기도 가운데 몸을 지닌 사람들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으로 통합되어 간다. 기도를 주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갈망이다. 인간의 몸, 마음, 성, 욕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그에 반하는 것, 중립적인 것 등이 섞여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욕망을 지니고 하느님 앞에 나와 그것을 그분께 개방해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손길 속에 하느님의 갈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코클리는 기도에서 ‘갈망’이 ‘성’보다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금욕주의asceticism: 이 용어가 ‘훈련’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기에, 수덕생활, 수덕주의, 영신수련 등으로 옮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신체 단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수덕asceticism이란 몸을 강인하게 훈련하듯이, 영적인 단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자가 되기 쉬워지고, 박해 시기의 열심과 헌신이 약해지면서, 사막 등에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공동체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열심과 훈련을 뜻하는 수덕생활이 수도원을 연상시키게 됩니다. 코클리 강연의 결론이 ‘새로운 수덕주의’a new asceticism of desire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를 금욕주의라고 번역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는, 기도가 인간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포괄하는 열정인데 그것을 배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더 깊이 머무려는 갈망을 외형적인 금욕과 자기 공로로 퇴행하는 형식주의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갈망을 가지고 나오지만 하느님 뜻에 내려 놓는다’는 표현은 향심기도 등을 실천해 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심상이 떠오르기 어려운 표현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명료해지기 보다는 어둠을 지나간다’는 등의 교부들의 기록들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유서 깊은 교회인 새문안 교회에서 ‘갈망의 새로운 수덕생활’을 접하게 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간 한국의 성공회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 오고 일구어 온 영적 유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교회: 바르트주의자의 묵상”

지난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동아시아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인 5차 연례 포럼’이 일본 교토의 도사샤 대학과 피정센터에서 열렸다. 이 포럼의 기조 강연을 한 사람은 미국 듀크 대학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즈Stanley Howerwas였다. 5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 이 강의에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홍콩, 대만 등에서 온 포럼 참가자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스텐리 강연의 요지

강연 제목은 ‘부상하는 민족주의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 아시아의 교회: 바르트주의자의 묵상’이었다. 강연의 내용은 ‘민족주의와 기독교’, 바르트가 말한 ‘정직한 무지’ 소개, 그리고 대안으로서 ‘제도화와 일상’이라는 세 주제로 나누어져 있었다.

1. 민족주의와 기독교

하아어즈는 서두에서 서구 기독교왕국Western Christendom을 언급하는데, 다양한 사람들과 관습들을 하나의 틀로 아우르려는 기독교왕국 전략이란 ‘정부나 법의 권위 아래 교회를 강제로 하나되게 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시아에 왔던 선교들은 기독교왕국의 교회 출신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뿌리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시아 교회도 그들에게서 기독교왕국들의 잘못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민족주의nationalism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외부 세력의 영향과 건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주권을 행사하려은 바램’이라는 뜻과, 둘째는 ‘자신의 나라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탁월하다고 여기는 감정’이라는 뜻이 있는데, 하우어즈의 용법은 둘째의 것에 해당한다. ‘진정한 (백인) 기독교의 미국을 재건하자’는 구호와 같은 배타적인 국가주의를 염두에 둔 용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우어즈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복음 증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신학적 확신 때문에, 주도권에 집착한다”는 대너 로버트Dana Robert의 진술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글을 가르치고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물을 파는 행위조차도 토착문화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하우어즈는 “미국 개신교의 교단주의가 미국이 참여한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원해 왔다”는 피터 라이트Peter Leithart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이런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십자가에 기초한 공교회적 헌신’catholic commitment이 아니라 ‘좋은 게 좋은거다’라는 미국의 통념에 기초한 연합에 헌신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종교를 법률로 제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주의적 정책을 위한 통제가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성 또는 배타성은 라이트에 의하면 미국 이민자들의 지위에서도 나타난다. 이민자 자녀들이 빨리 미국인이 되기 외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만, 결국 그들은 좋은 미국인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즈는 이러한 현상을 아시아의 교회들에 적용하도록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현상이 미국에만 국한 되는 것이고, 아시아의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는 아시아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핵심적인 도전 중 하나로, ‘이 지역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민족주의이 발흥을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문제를 꼽는다. 과거의 상처들을 극복하고 친구들을 얻으려는 노력, 성령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하우어즈는 칼 바르트Kahl Barth의 정직한 무지Honest Ignorance를 인용한다.

2. 정직한 무지

바르트는 동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한 편지에서  ‘정직한 무지’를 언급하였다. 당시 그는 ‘맑스주의 땅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어떤 조언을 하려면 동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봤어야 하며,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이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동유럽 밖의 그리스도인들은 동독의 공산당과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정직한 무지를 행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하우어즈는 이 ‘정직한 무지’를 기독교왕국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의 정치를 형성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밖에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정권도 편애할 수 없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우어즈는 이 정직한 무지를, 부르스 케이Bruce Kaye가 말한 ‘공교회성’catholicity과 연결시킨다. 공교회성이란 “기독교 신앙에 지역적인 경험을 뛰어 넘는 더 넓은 차원이 있다”는 관점으로서, 케이에 의하면, 공교회성은 인내, 상호 존중, 겸손과 같은 기독교적 덕목으로 표현된다. 하우어즈는 이 공교회성이 교회 간의 상호교류의 실천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미국처럼 인내심 없는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인내심과 겸손과 같은 덕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가, 일본, 중국, 한국, 홍콩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우어즈에게 있어서 정직한 무지, 공교회성, 겸손, 수용, 상호교류 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소위 기독교적인 정치 강령 또는 정책을 가지고 국가를 통해 전 사회에 무언가를 관철시키려는 것에 대하여 조심스럽다. 그것이 자칫 정책의 절대화 또는 우상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그는 덕목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을 제도화와 일상화를 통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3. 제도화와 일상

하우어즈의 강연에서 특별히 두드러졌던 내용 중 하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이다. 그는 “오늘 기독교가 존재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였다. 아시아의 교회가 세월을 견뎌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에 의하면 제도란 “세월을 지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인간 행동의 기초적인 가치 위에서 사람과 사물의 관계 패턴에 연속성을 유지시키려는 시도”이다. 제도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우어즈에게서 이 제도화의 주요한 형태는 ‘덕목’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차이점으로서, 다른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상한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덕목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평화적으로 산다는 것이 갈등이 생길만한 상황을 피하는 것은 아니기에, 하우어즈는 미하일 이냐티에프Michael Ignatieff의 개념을 빌어, 평화의 동의어로서 ‘권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냐티에프에 의하면, 이 권리라는 단어는 교육받은 사람들, 중산층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 교사나 학생들에게 친근하며,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보다는 ‘신뢰’, ‘관용’, ‘용서’, ‘화해’, ‘회복력’ 등과 같은 일상적인 덕목을 통해 권리와 평화에 접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덕목은, 매일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제도화로서의 일상적인 덕목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세계적인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뿐 아니라 현실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은 사안으로서 너무나 약해보이는 방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이에 비해 거대한 바위와 같아 보이기에, 하우어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자신과 반대되는 명제들 또는 반대되는 세력들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워가고 싶은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고, 일상적인 덕목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형성, 재형성함으로써, 하느님의 인내하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노트: 명상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머튼)

제주 피정을 다녀왔다. 성 이시돌 피정관에 비치되어 있는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볼펜과 노트를 사서 정성껏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들을 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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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목은 ‘What is Contemplation?’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이라고 번역하였다. 한자를 찾아 보니 ‘어두컴컴하다’는 뜻의 명(冥)자를 썼다. 감각에 연결된 피상적인 생각들을 가라앉히고 희미하고 깊은 생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명상’이라는 용어는 담고 있다.  성전(temple)은 ‘공개된 성별된 공간'(open or consecrated space)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이 하느님의 궁전(temple)에 하느님과 함께(con) 있는 것’이 contemplation이라’는 씨튼 수녀회 수녀님의 해석을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 영영사전을 보면 ‘무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 또는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여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고, 어원인 templum에 대하여는 ‘바라봄의 장소'(place for observation)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 안에 이렇게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관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 세상

이 책은 이 신비적 명상이 ‘하느님께 거저받은 선물'(grate gratis data)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제일동인이시라는 점에서 주부적(注賦的, 쏟아 부어 주시는) 명상, 신비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은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수동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이 이루어 낸 성취 또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머튼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한다.

그들은 정말로는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들 자신의 욕망, 그리고 문제거리, 안락, 즐거움과 그들의 모든 세상 관심거리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온 몸에다가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두르고는 지구 표면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명상과 성성(거룩함)의 씨앗은 그들의 영혼 안에 뿌려졌으나 그 씨앗들은 그저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 씨앗들은 싹이 트지를 않고 있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있다.

하느님은 이러한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니, 그들이 정말 깊은 열망으로 그분을 찾지 않는 까닭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 둘 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2. 영적 선물에 대한 열망

두번째 장에서 머튼은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 선물들을 열망하고 받게 되는가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세상의 일들과 물건들에 마음이 사로 잡혔던 사람이 영적 선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또한 그것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하여 그것에 대하여 알게 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귀 기울임과 바라봄과 순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발췌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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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세상’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사(일, 事)과 물(물건, 物)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가 성신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이 건네 올 것임에 틀림 없는 모든 만족과 이익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욕망을 잦아들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들은 저급한 사물들에다 그들의 정신을 다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영적인 선물들은 열망되지 않고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식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면 열망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적어도 그와 같은 일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없다면 분명 그러한 일치를 열망할 수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자기가 하는 활동과 일시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마저 스스로 내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명상의 기쁨에 대하여 무언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체험이다.

‘보고 맛들여라. 무릇 주님이 맛스러우심을.

그 맛스러움을 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14:23).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합당하게 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순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맛 볼 미각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뜻에 온전하고도 빈틈없이 양순히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명상이 되게끔 하는 하느님 사랑의 아주 극미한 움직임에 내맡겨 이끌려가는 섬세한 본능이다.

3. 능동적 명상

머튼은 이 책에서 수동적 명상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이 장에서는 능동적 명상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한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돕는 한에서 능동적인 명상의 부류에 속한다.

능동적인 명상에는 이제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 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wine and bread능동적 명상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례(예전)와 일상의 활동들을 예로 들고 있다.

전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들이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명상적이 되는데, 그 참여는 거룩한 미사(성찬례) 중에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부적 기도에 몰입하는 가장 평범한 길 중의 하나가 거룩한 친교(성체)로 주어지는 은총을 통하여 마련된다고 하는 사실에 조금도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활동 안에서 누리는 하느님과의 일치:  그리스도는 거룩한 삼위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비록 그들이 활동적인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이 행하고 고통받는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순명, 형제적 사랑, 자기 희생, 그리고 하느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김을 통하여 체득된 마음의 지극한 순수성으로 인하여 버금-명상가들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니, 외양으로나 좀 더 깊은 내적인 삶을 붙좇아 왔던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성성의 단계에 이르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을 바라며, 그리고 그분의 사랑만을 바라며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지 않을 재간이 없다.

4. 수동적(주부적) 명상

수동적 명상은 하느님께서 쏟아 부어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을 직관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엄밀한 말 뜻에서 볼 때,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데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 준다.

신비적 명상은 순수한 사랑에서 난 하느님에 대한 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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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

‘그분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여 완성 그 자체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모든 사랑의 으뜸된 대상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하고 무사한(無邪, 간사함이 없는)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것만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기쁜이요, 모든 보상 중에서 최고의 보상일 수 있는 까닭에, 사랑한다는 바로 그 행위가 사랑에 대한 가장 탁월한 상급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 이외의 원인도 결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 결과요 그 자체 수단인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5. 어둠 속 빛살

머튼은 이러한 은총의 선물이 때로는 고통과 메마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내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외적인 것에 다시금 몰두하게 된다고 한다.

명상을 통하여 체험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혼에게 평안과 강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하나 때로 그 평안은 고통과 어둠과 메마름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리기도 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기운찬 힘은 때로 우리 자신이 극도의 무기력, 무능을 느끼게 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면서는 특히 그것이 그대에게 하느님에 대한 분명하고도 똑 부러진 어떤 인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햇빛이 병든 눈을 자극하듯 하느님의 빛은 저 영혼을 자극한다. 그 빛은 통고를 일으킨다.

주부적 명상 안에서 얻는 하느님 체험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상상해 왔던 일체의 것에 대한 전면적인 모순이다. 그분의 주부적 사랑의 불꽃은 인간적인 위안들에 연연해 하고 있는, 그리고 초보자였을 때에는 필요로 했었던 그런 빛과 느낌들을 그릇되이도 기도의 무슨 커다란 은총인 양 상상하면서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영혼의 자기애에다 가차없이 공격을 퍼 붓는다.

그렇게 되면 조만간에 주부적 명상은 영혼 안에 겁나리만큼 무서운 내적 변혁을 가져온다. 기도의 감미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묵상은 불가능해지고, 싫어지기조차 한다.

내적인 생활은 어둠과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 때가 기도 생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빛살이 너무 강렬하여 그들이 눈 멀어 버린 까닭에 그들에게 그 빛은 어둠 속 빛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처지에 저항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길 안내자이기를 원한다.

그들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심기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외적인 것들에다 자신을 몰아 붙인다.

6. 시험

머튼은 모든 어두움이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그러한 어둑한 가운데서 빛을 발한다고 말하였다.

일반 원리들은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유용하다.

묵상을 하는 도중에 겪는 건조함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분투하면서 느끼는 무력은 그 자체로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메마름과 무력은 죄나 불충실의 결과이거나, 혹은 단지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건강이 나쁜 데서 발생한 것일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괴로움 그 밑에서, 어둠의 장막 그 뒤에서, 고통 그 너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확실하고도 긍정적인 표지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 표지들은 그 시련들이 주부적 기도의 질서에 속하는 정화일 수 있게끔 해 줄 것이다.

(평안, 잠심 그리고 열망)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어둠 속으로 이끌려든 영혼이 거기에서 깊은 잠심을 찾아 얻고 세상과 물직적인 것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뒷전으로 잦아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 물론 흐트러짐이 있어, 영혼의 열망에 맞서서 끊임없이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 이 역시 주부적 기도를 드리는 증거가 될 것이다.

기쁨과 평안과 충만함은 오로지 메마름과 믿음의 이 고독한 밤 어딘가에서만이 찾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자라난다.

영혼은 어느 날, 이 어둠 속에서 그가 살아께신 하느님을 만나 뵈었다는 것을, 도대체가 기대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그분이 거기 계시고, 그기고 그분의 사랑이 사방팔방에서 자기를 에두르고 있고 자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에… 그 순간에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중요한 실재라고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어둠은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어둑한 그대로다. 하나 그것은 가장 밝은 한낮보다도 더 밝아진 것 같이 느껴진다.

비록 외적으로야 고통과 시련과 노고가 배가될지라도 그 영혼의 내적인 삶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것은 한 생각, 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 홀로만으로.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이니, 이 사랑은 성 베르나드도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다른 모든 활동을 자기 안으로 이끌어서 흡수해 버린다.

‘사랑은 그밖의 모든 것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열정을 사로잡는다.’

이 주부적 사랑은 그 모든 힘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들을 그분께로 들어 높인다. 그의 열망과 애착심을 점점 더 세상과 썩어 없어질 것들에서 떼어놓으면서 말이다.

7. 무엇을 할 것인가 – 십자가 성 요한의 가르침

머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정화하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권면한다.

st-john-of-the-cross1명상기도를 할 때 훌륭한 지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그대 영혼 안에서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모든 자연적인 확신에 관하여 그대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비워내는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실제 체험적으로 대면하는 문턱으로 그대를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대를 불명료한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 어스레하고 때로는 극고極苦를 일으키는 믿음의 빛의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가치를 배우라.

그대 삶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것은 어떤 것도 피하도록 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평안과 고요와 은거 안에 살라.

그리고 설령 하느님께 제아무리 커다란 영광을 드릴 것 같아 보이는 수고와 직분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휘둘려 그대의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들려는 그대의 열망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사심없는 사랑과 커다란 평안 속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들을 수행하라.

그대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잠심을 유지하라. 또한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부어 주시고 있는 단순한, 그리고 단순화하는 빛살을 누리며 거기서 쉬어라.

기도를 해 자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얼마나 진전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오직 한가지만을 찾아 구하라. 하느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을 더더욱 정화하는 것. 더욱 더 완전하게 그분의 뜻에다 그대 자신을 내맡겨 드리는 것. 보다 오롯하고 보다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보다 평안하게. 그리고 보다 온전하고 굽힘 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성성과 명상은 오로지 정화된 사랑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활동가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자기들의 외적인 업적들로 싸감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도록 하자.

만일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쏟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유일을 교회에 가져다 주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는 훨씬 더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한가지 일로 그들이 지금 수천가지 일들로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적은 수고로 이루어 낼 될 것이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이 순수한(신비로운) 사랑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하며 교회에 더 커다란 유익이 된다.

8. 정적주의의 위험

이 비움은 비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한 것임을 머튼은 명확히 한다. 이 기도는 조용함과 마음의 고요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고 열망하는 기도인 것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창조된 사랑을 비워 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 맨 위로 곧장 내리 비춰지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의 정신에서 모든 창조된 형상들과 환영들을 몰아낸다.

반면에 정적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철저한 무화無化라는 거짓된 관념을 붙좇으면서 그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을 비워내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움직임도 없고, 생각도 없고, 지각도 없고, 사랑의 행동도 없고, 수동적인 감응도 없는, 게다가 내적인 삶의 빛이라든가, 다사로움, 생기, 어느 것 하나 없는 단지 공허만이 있을 따름인 어떤 영적인 진공속에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실상 참된 명상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 없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사실로 하여 고통을 겪는다.

사랑과 겸손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며 쓸쓸함과 고독과 메마름과 번뇌에 휩싸인 그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라. 고난의 밤에 그분께 대한 그대의 말 못할 그리움은 그대의 가장 감동 깊은 기도가 될 것이고 그대에게, 그리고 교회에 훨씬 더 값질 것이며, 지성이나 상상력이 가장 높은 자연적 단계에로 고양된 것보다도 더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첫 열매들을 맛본 그대여,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께 영광을 노래 불러 드려라.

그리고 그대 영혼 안에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 드려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빛으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시는 아버지시며, 사랑을 빚으시는 분이시여, 우리 영혼 안에 성령의 일곱 선물을 보내 주소서.

죄에서는 물론이고 지상에서 얻은 모든 덧엇는 지혜에서도 우리의 정신을 깨끗이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단순하고 참되이 당신의 지극한 성지聖志를 유순히 따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아드님 예수의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게 비추게 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하소서.

Veni Domine Jesu! Amen.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론과 영국의 ‘선교형 교회’

지난 2016년 6월에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론과 영국의 선교형 교회 –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나왔습니다. 이 연구는 선교 상황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신학을 탐구하기 위하여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론과 영국 성공회의 교회 개척 보고서 선교형 교회를 접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 기독교왕국이후와 교회

뉴비긴 신학의 중심 질문은 ‘기독교왕국이후’의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뉴비긴에 의하면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게 된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없습니다. 기관이나 제도나 힘보다는 회중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의 호소력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표현들fresh expressions’이란 교회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 속에 심어진 회중들 또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새로운 표현들의 다양한 사례들과 신학들과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 경험과 신학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동일한 모티브, 즉 선교와 복음 증거와 회중 등을 추적하여 보면, 현재의 새로운 선교적 시도들에 도움이 될 하나의 흐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때에 이러한 맥락적 이해, 교회론에 대한 반영이 필요합니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기독교왕국 해체 후 서구의 선교적 교회에 대한 신학의 자취를 뉴비긴과 ‘선교형 교회’를 연결하여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2. 뉴비긴의 선교-세계-교회

뉴비긴 신학의 주제는 크게 선교, 세계, 교회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뉴비긴의 선교 이해는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가 자각한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부가물로 보아서는 안되며 교회는 선교의 대행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선교 신학의 출발점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발견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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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긴의 교회관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2년을 전후로 크게 전환을 이루는데, 기존의 배타적이고 교회 중심적 선교관에서 삼위일체 신앙에 기반한 선교학으로 나아간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뉴비긴의 새로운 교회관은 성경을 읽어가면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첫째는 구약에서 세속적인 사회의 순례자였던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묵상이었고, 둘째는 신약에서 예수의 제자 파송에 관한 묵상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제자들은 성경공부를 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출정을 앞두고 사령관의 연설을 듣는 장병들과 같았습니다. 교회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현장, 즉 자신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드러내도록 파견을 받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회중들’이 세속 사회의 선교를 위한 뉴비긴의 교회상입니다. 이와 같이 뉴비긴은 세속적인 세상에 순례자로 부름받은 공동체, 세속적인 세상 속으로 나아가도록 보냄받은 공동체로서 회중을 교회의 원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증언하는 회중’ – 이것이 뉴비긴의 교회이며 선교의 핵심입니다.

3. 교회개척과 새로운 표현 

2004년의 보고서 ‘선교형 교회’는 영국 사회의 변화, 영국 성공회의 교회 개척의 개괄, 국내 선교의 신학과 교회론, 새로운 표현들, 방법론들과 구체적 제안들을 담고 있습니다. 보고서 ‘선교형 교회‘는 이보다 선행한 영국 성공회의 보고서 새땅 열기‘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이 두 보고서의 공헌은 온건한 어조로 다양한 교회개척 시도들을 정당화해 준 데에 있습니다. 교회개척과 새로운 표현은 지역, 이웃, 문화, 네트웍들 가운데 회중을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뉴비긴은 ‘마을 단위의 건강한 회중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는데, 새로운 표현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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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이란, 보고서 ‘새땅 열기’에 따르면, ‘목표가 되는 지역, 이웃, 문화, 네트웍 속으로 모체가 될 작은 회중을 이동시켜서, 마치 묘목에서 커다란 나무가 나오듯이, 그 토양에 뿌리 내린 회중을 성장시켜 내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보내는 교회를 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양 속에 씨앗은 썩어서 없어지고 새로운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개척은 복음의 토착화 과정이며, 뉴비긴과 보고서 ‘선교형 교회’는 동일한 통찰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표현이란 ‘교회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을 향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입니다. 넘어야 할 장벽이 많이 있기에 새로운 표현에는 ‘훈련된 개척 팀’이 필수적입니다. 새로운 표현의 파이어니어들은 신앙과 불신앙의 장벽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오라’라는 미온적인 방법으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협소해진 현대의 선교 상황에 절실히 요구되는 선교 실천입니다.

4. 보고서 ‘선교형 교회’와 뉴비긴

보고서 ‘선교형 교회는 뉴비긴을 네 번 인용하였습니다.

  1. 하느님 나라가 교단의 교회 전통보다 우선합니다. 교회는 네트웍 사이에 생긴 구멍들을 메우고 수많은 공동체들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교회개척의 원칙은 토착화이며, 그것은 목표 지역, 이웃, 문화, 네트웍의 상황을 무시하고 기존 교회들을 복제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3. 교회론에 관하여 – 교회는 세속 사회 속에 순례하였던 아브라함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호소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모으시는 주님을 뵙기 위하여 나아가는 선교적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4. 교회 개척이 바울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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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들을 보았을 때 보고서에 나타난 선교 – 교회 – 교회개척에 관한 주요한 사상들에 뉴비긴이 공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뉴비긴은 기독교왕국이 끝나고,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에서 비주류로 밀려나고, 그간 교회가 누렸던 특권들이 사라진 상황을, 새로운 거듭남의 계기로 이해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선교하는 공동체,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사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계기로 여겼던 것입니다. 뉴비긴은 건강한 작은 공동체로부터 새로운 선교 상황에 대처하는 원동력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가 내부에만 몰입해 있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교회의 역할은 그 교회가 일할 자리인 세상을 통하여 계속 재정립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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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형 교회 – 비아

뉴비긴이 제시한 ‘복음을 새롭게 증언하는 회중의 공동체’는 ‘선교형교회’의 교회개척 이론과 실천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보고서에서는 ‘회중’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유연성한 개념 – ‘새로운 표현’을 기반으로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다양한 교회개척과 ‘새로운 표현’의 경험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선교의 본질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길은,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론을 함축하는 명제 – ‘세상 속에 증언하는 작은 공동체’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표현은 레슬리 뉴비긴이 씨름하였던 선교적 교회에 대한 신학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오늘의 맥락에 맞게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 선교적 교회론은 오늘 한국 기독교가 새로워지기 위하여 주력해야할 이론과 실천의 분야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열쇄말: 레슬리 뉴비긴, 선교형 교회, 교회의 새로운 표현, 교회개척, 선교적 교회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On Call)

도서출판 ‘좋은 씨앗’에서 한국판 출간 (2010. 8. 20)

기독교 출판사 ‘좋은씨앗’에서 최근, CMS의 스튜어트 부캐넌 님이 지은 ‘On Call’을 한국어로 발행하였다. 그는 20여년간 CMS에서 일하면서 경험과 통찰을 이 책을 통하여 나누고자 하였다.  이 책의 첫 장에는 CMS 아시아의 두 사람의 추천 글이 올라 있다. 독서의 계절을 앞두고 여러분의 정독을 권하며 추천의 글을 올려 본다.

추천의 글 1.

저자 스튜어트님을 만난 것은 두 해 전 겨울. 그는 서울에서 선교사 면접에 대한 일 주일 간의 연구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영국 센터에서는 선교 지원자가 오면 서류면접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2박 3일의 면접을 한다. 그 때 지원자는 여러 면접 위원들을 일대일로 번갈아 만나, 스스로의 소명에 대하여 강도 높게 점검을 받게 된다. 저자의 글에서 ‘씨름하다’, ‘긴장’ 등의 단어를 자주 보게 되는데, 이 선발의 과정은 그야말로 힘겨운 씨름이며 정신적인 노동이다.

교회선교회 초창기 설립자의 글에서 ‘선교의 성패는 어떠한 구경의 사람을 보내는가에 달려 있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는데, 선교사를 대포에 비유한 것은 인상적이다. 대포의 지름(구경)이 작으면 그만큼 작은 포탄이 들어가고, 당연히 날아가는 거리나 폭발력이 작을 수 밖에 없다. 그 반대의 경우 엄청난 넓은 영역이 그 강력한 대포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된다. 그는 한 선교 단체의 인사 책임자로서, 이렇게 선교의 성패가 갈리는 선교 지원자 면접에 팽팽한 긴장을 느끼며 온 지혜와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씨름하였을 것이다. 그의 글에 성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의 소명을 점검 받고자 온 한 사람 한 사람을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야곱, 바울, 마태를 직접 만나는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직접 ‘어디로 가라’ 그리고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수많은 성서 인물들에게도 줄곧 그렇게 하셨다. ‘오늘 당신에게도 이렇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머무는 곳은, 진정 소명의 자리입니까?’ 목회나, 사역이나, 사업이나, 전문직이나, 육아나 어느 영역이든지, 스스로 이 죄 된 세상을 향한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물어 보라고 한다. ‘예’라면 그 사명에 충실하게 그 자리에 머물고, ‘아니요’라면 다시 소명에 대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on call’이다. ‘소명에 대하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출동 대기 상태’로 직역할 수도 있다. 전화만 오면 바로 달려나가는 소방서나 재난구호 센터, ‘땅’ 소리를 기다리는 육상 선수의 ‘준비’ 상태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교의 사명으로 대화하시는데, 우리는 부르기만 하면 금방 달려 나갈 수 있는 깨어 있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단숨에 읽어 내려갈 그런 책 같지는 않다. 친정 엄마가 딸에게 보낸 꾸러미 같다고 할까, 노련한 등산가의 배낭 속 같다고 할까?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깊이 있는 성서 인물들에 대한 묵상들, 신앙적인 성찰들, 선교 단체의 경험과 일화들, 선교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 선교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 등, 때로는 곱씹어 보며 때로는 기도하며 정독을 하게 된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며 씨름하는 첫 두 장은 특히 더 많은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다.

이 책은 한 명의 선교사가 소명을 확인하고, 훈련 받고,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가, 조화를 이루며 일하고, 사람들과 협력하고 또 세워주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신 식민주의, 타 종교와의 관계, 성공주의, 전인적 선교, 재능, 교회 등 여러 주제에 대한 균형 잡힌 통찰과 개념을 얻게 해 준다. 예전에는 선교사로 가면 평생을 헌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수 년 또는 수 개월로 사역의 기간이 짧아졌다. 직업도 주로 종신직업이었던 것이, 이젠 짧아진 정년과 재택근무 시간제근무 등으로 유동적이 되었다. 은퇴 후에 건강하게 보람된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과 두 개 이상의 직종을 가진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도전하려는 이들의 기도가 더욱 일상화되고 중요해진 이 시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이 소중한 통찰의 보고이자 꼼꼼한 매뉴얼이 되리라 확신한다.

나성권 신부, 교회선교회 서울 센터 소장

 

추천의 글 2.

교회선교회(CMS)의 전신인 ‘아프리카와 동 아시아 선교회’는 1799년에 설립되어 이제 2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수 천의 선교사들이 서방으로부터, ‘복된 소식을 선포’하라는 부르심(call)에 따라, 복음을 지니고 서방으로부터 온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교회가 생겨났을 뿐 아니라, 의료와 사회 봉사, 교육 기관,
농업 발전, 사회 개발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img_0622지난 25년 동안 저 자신의 선교 여정을 살펴 보아도, 마약 중독자들 가운데 사역하기 위하여 저의 가족이 파키스탄에 간 것을 시작으로, 교회선교회의 지역 이사로서 유럽, 중동, 중앙 아시아, 남 아시아를 거쳐 최근에 동 아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현재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 즉 하나님께서 변화를 이끄시고 우리는 이 변화에 응답합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이끄신 변화입니다.)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합니다. 지난 에딘버러 1910 선교대회의 메아리처럼 2010 선교대회가 일본과 남 아프리카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남으로의 이동, 즉 지구 남반구 주도하에,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물결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교회선교회는 계속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과 유럽에서뿐 아니라,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국 사무소도 교회선교회에 일고 있는 이 변화를 반영합니다. 그 변화란, 과거에는 유럽을 본부로 하였다면, 이제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자체의 선교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커다란 흐름입니다.

이 책은 지구 북반구를 배경으로, 지난 두 세기 동안 선교의 방대한 경험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남반구가 세계 선교에 부상하고 있는 상황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로 큰 선교사 파송 국가이고, 그런 의미에서 영어판보다 오히려 그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소명에 대한 느낌을 더 깊이 생각해 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판의 출판은 저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새로운 발전입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소명에 하여 돌아 보는 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보내거나 후원하고자 하는 목회자나 교회들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교회의 본질이 ‘선교 지향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선교 지향적’이며,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교 사명이란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에 대한 선교에서 시작하여 먼 나라에 가는 선교의 사명까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모든 이들이 복된 소식에 부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신앙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

필 심슨 목사, 교회선교회 아시아 이사

Dominic Shin is going to Mongolia

Thanks for your prayer for mission in Mongolia. Dominic Shin and his family are preparing to go there, following Joseph and Susanna Lee who has been sent from CMS Seoul Center to Ulaanbaatar in January 2010.

This was started in 11 March 2010 when Gamaliel Kim visited the center from Mongolia to find a partner for his new project. He served with program concerned illiteracy over eleven years in this capital city. He is preparing an NGO for bringing up ecological alternatives in housing, fuel, lavatories, agriculture and so on. Dominic is getting VISA as a student who studies Engineering, for setting an NGO may take time.

He has just returned from three month’s service to build the center building. They pile up long nylon sack filled with sands to build the house. The family will move to Mongolia during this autumn. I post his letter asking for your prayer and support.

Dear partners in mission,

I greet you in His love and grace. There were not few changes in steps of my family – the place to go is altered totally. I have prayed with wish to go to India for three years. It was happy time longing to go to Varanasi, but now I feel that He is leading me to Mongolia than Varanasi. I am going back to the first time when He called me, and discerning the steps which I would make.

I listen to a voice from inside of me. ‘Lord, if you allows, I am willingly to go.’ It is not easy to think about going to an unknown land, giving up a place which is getting familiar. The same throb and fear is in me and my family as the time of longing for India. Pray for me to go with courage.

I remember that Paul changed the way of his journey when he got an invitation to Macedonia during the night. (Act16:9-10) I pray for myself to be steady in choosing His plan and in giving up my own desires. Your prayer will make the steps firm toward the mission in Mongolia.

Love and bless you.

Dominic, Hyon-A, Hyon-Gyun and Se-Un

몽골에서 온 편지

센베노!

오늘 7월 11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기념일인 나담축제의 시작날입니다.  이날은 몽골 사람들은 세가지 운동 즉,  부흐(씨름), 활쏘기, 말달리기를 합니다. 오늘 부흐와 활쏘기를 관전하고 왔습니다. 말달리기하는 시합장이 멀고 시간이 지나서 관전하지 못했습니다. 부흐와 화쏘기는 버스로 30분거리에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좀 엉망이 된듯한 분위기 였습니다. 소나기가 약 1시간쯤 우리네 장마철 비처럼 내렸습니다. 시장끼를 달래려고 간의 음식점에서 호쇼르라고 하는 양고기 튀김만두같은 것을 비를 맞으며 사 먹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일터의 몽골 형제들은 지난 월급을 주어서 3일 휴가들을 보냈습니다. 휴가들이 끝나면 현장에서 다시 함께 사역을 진행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계속 현장에서 머물예정입니다. 여러 생태 자재들을 물색하고 기술 자문들을 구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무더울 정도로 햇살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밤 9시가 다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몽골의 하루는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몇 일전 밤하늘을 보면서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은하수가 너무 선명하고 곧 별들이 내 머리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고 손만 뻐치면 잡히것 같은 수만은 별에 둘러싸인 그 날밤! 무엇으로 그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요?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어 언젠가 함께 그 밤의 감동을 나눌 날들을 기대해 봅니다. 저희 숙소 게르위에는 항상 북두칠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혹시 밤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발견하신다면 그 아래에서 제가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고 기도해 주세요! 유난히 은하수를 가로질러 유유히 빛나고 있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유난히 그들의 못다이룬 사랑을 속삭이는 밤인듯하여 저도 두고온 사랑하는 이들이 사뭇 보고싶어 말없이 눈물적시는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늘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은 이들! 그들을 제가 가슴에 품고 오늘 잠들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

1980년대에 처음 묵주기도를 시작했던 린 바우만 신부님의 묵주에서 산 다미아노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노랑과 주황의 밝은 색으로 빛나는 이 십자가 모양의 이콘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듯하다. 이 이콘에 대한 이야기는 성 프란시스의 젊은 시절에서 시작된다.

프란시스는 전쟁과 포로 생활로 건강을 잃어 거의 죽음에 이르렀으나,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몸이 허약하고 영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은 그는, 그가 그동안 추구해 온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께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 더 마음을 열어 드렸을 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이 낫자, 그는 아시시의 숲과 작은 예배당 근처를 거닐면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에게 곧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은 그 분 앞에 머물렀다.

그가 자주 갔던 곳이 산 다미아노 교회였는데, 성벽 밖 벼랑에 반쯤 무너진 채 방치된 곳이었다. 이 폐허에 실물 크기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아이콘이 달려 있었다. 1206년 여름 어느 날 그 근처를 걷다가, 안으로 들어와 기도하라는 영적인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다. 이 내면의 소리에 따라, 그는 계단을 내려와 어두컴컴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와, 낯익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서 무슨 분부를 하실지 기다렸다.

기다림의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 보았을 때,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는 기도하였다.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느님, 제 마음 속 어둠을 비추소서. 옳은 믿음과, 확고한 소망과, 온전한 박애심, 분별력과 지식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명령을 수행하게 하옵소서.” 지극한 고요 가운데 그는 이 기도를 반복하면서, 마음 속에 못 다한 기도가 이 한 마디에 담겨 나올 때까지 계속 하였다.

어느 새 아이콘의 눈은 떠 있었고, 프란시스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움직임은 그에게 놀랍기 보다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 때 십자가에서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착하지만 말귀가 어두운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가 일러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프란시스야, 나의 집이 무너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니? 나를 위해 이 집을 다시 지어 주렴.”

그것이 그의 사명(mission)이 되었다.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그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지어, 예배 공간으로 재건하였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시신이 아니라, 영원 불멸하신 하느님께서, 생명의 원천으로서 부활의 소망을 빛으로 발하고 있다. 구주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빛은 연민을 품은, 그러나 왕과 승리자의 강인함을 담고 있다. 손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를 위한 탄원과 축복의 손길로, 평온함과 부드러움을 나타내 준다. 십자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고결함과 평온함을 보여 준다.

십자가 위에는 천사들에 둘러 싸여 승천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손 주변에는 그분의 놀라우신 희생에 대하여 전하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곁에는 왼쪽으로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 오른 쪽으로 막달라 마리아, 글레오파, 백인대장과 예수께 고침받은 그의 아들이 서 있다. 그 아래의 작은 인물로 왼쪽에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병정, 해면에 초를 묻혀 긴 막대기로 예수께 권했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예수의 무릎 오른쪽에 닭이 그려져 있는데,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고 닭이 울 때에 통곡하였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발 밑에는 성인들의 그림이 있었으나 지워져 흐릿하게 되어 있다.

산 다미아노 십자가를 새로 고안한 묵주에 달며 린 바우만 신부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그토록 십자가를 사랑하고 응시했던 프란시스와 클라라를 생각했을까,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했을까. 십자가를 묵상했던 오래된 찬미의 가사를 떠올려 본다.

“우리는 흠숭하고 찬미하나이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속하셨나이다.

팔목에 지니도록 만든 묵주

목걸이나 팔찌로 쓸 수 있는 묵주들이 있다. 보통 가방이나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는 것에 비해, 몸에 지니는 경쾌함과 색다를 느낌이 있다.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매일 머리 맡에 묵주만 놓아 두면 뭘해요’라고 어머니에게 묻곤 한다는 어느 청년에게, ‘그냥 지니는 것도 기도가 되지 않을까 ‘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소한 20분씩 매일 꾸준히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고 싶다.

그래서 가능하면 직접 기도를 드릴 때 손이 얼마나 편한가를 늘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만든 묵주는 두 겹으로 손목에 끼울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팬던트 형으로 달랑거리는 멋도 있겠지만, 십자가를 묵주의 원 속에 넣었다. 기도는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나지만, 기도하는 동안 십자가는 주간 구슬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실은 두 가닥을 쓰고, 매듭은 큰 간격에 14번, 좁은 간격에 5번 사용하였다.

응용: 꽃과 나뭇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