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향한 열정 – 사라 코클리

지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새문안교회에서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가 주었던 메시지의 여운은 지금도 잦을 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몇 가지 열쇄말을 이해해야 한다. 

1. 기도와 갈망

한국어 번역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갈망desire을 ‘욕망’으로 번역한 것과, 둘째는 수덕생활asceticism을 ‘금욕주의’로 옮긴 것이다. 사실 욕망이라는 번역이 지닌 장점도 있는데, 기도가 인간들의 욕구와 욕망을 배제시킨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온갖 바램과 희망과 허영이 뒤섞여 응어리진 마음을 다 가지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이라는 용어로 담아 낼 수 없는 광대한 영역이 있다. 코클리는 기도를 만유 또는 온 세계를 향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기도라는 스케일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의 본 줄기라고 한다면 ‘성령의 욕망’ 또는 ‘성령의 욕구’라는 표현 보다는 ‘성령의 갈망’ 또는 ‘성령의 갈급함’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운 것 같다.

르고 마음 속에 새로운 스파크를 일으킨다. 그의 발표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기도 생활의 광맥을 보여 주었지만, 그만큼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 낯선 개념들이야말로 기도 생활의 영역을 넓혀 주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박사가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움의 강사로 방한하여, 새문안교회에서 2019년 5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세 차례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는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한국 교회를 촉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도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과 간구에 참여하는 것이며, 자그마한 파편인 개개인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연 주제는 “기도, 욕망, 성: 오늘을 위한 삼위일체론의 재해석”인데, 그것은 크게  3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 기도, 성, 욕망의 상호관계
  2. 삼위일체 교리의 원천인 기도
  3. ‘고전삼위일체신앙과 현대’의 기도, 성, 욕망에 대하여

이 강연을 잘 이해하려면 욕망(갈망), 성, 금욕주의(수덕생활)와 같은 용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욕망desire

욕망desire: 고전 신학에서는 욕구needs와 갈망desire를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욕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세상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갈망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코클리는 기도의 원동력이 갈망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든 바램과 목마름이 결국에는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큰 바램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개인의 욕구와 신적인 갈망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샘이다. 그렇기에 욕망이라는 번역도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용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코클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걸러지지 않은 욕망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하느님 의지에 맡겨 드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검증test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자리 찾기’modulization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깨어진 파편에 불과한 욕망이, 만유를 위한 성령의 갈망을 만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이 기도라는 것이다.

2. 성gender

코클리는 성에 대하여 ‘gender’와 ‘sex’라는 두 단어를 병기하였지만, 이 강의에서 이 두 용어에 대해서 특별히 논한 바는 없다. 나는 여기에서 ‘성’은 사실상 인간의 몸body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마음soul이라고 하거나, 인간의 온갖 욕구와 갈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갈망이 ‘영’spirit에 관한 것이라면, 욕구와 갈망이 섞여 있는 인간soul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는 구체적인 존재이다. 성육신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과 마음과 성이라는 구체성 속으로 임하신 것이다. 기도 가운데 몸을 지닌 사람들의 갈망이 하느님의 갈망으로 통합되어 간다. 기도를 주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갈망이다. 인간의 몸, 마음, 성, 욕구에는 하느님의 뜻과 그에 반하는 것, 중립적인 것 등이 섞여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욕망을 지니고 하느님 앞에 나와 그것을 그분께 개방해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손길 속에 하느님의 갈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코클리는 기도에서 ‘갈망’이 ‘성’보다 주요한 측면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금욕주의asceticism: 이 용어가 ‘훈련’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기에, 수덕생활, 수덕주의, 영신수련 등으로 옮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신체 단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수덕asceticism이란 몸을 강인하게 훈련하듯이, 영적인 단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자가 되기 쉬워지고, 박해 시기의 열심과 헌신이 약해지면서, 사막 등에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공동체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열심과 훈련을 뜻하는 수덕생활이 수도원을 연상시키게 됩니다. 코클리 강연의 결론이 ‘새로운 수덕주의’a new asceticism of desire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를 금욕주의라고 번역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는, 기도가 인간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포괄하는 열정인데 그것을 배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더 깊이 머무려는 갈망을 외형적인 금욕과 자기 공로로 퇴행하는 형식주의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갈망을 가지고 나오지만 하느님 뜻에 내려 놓는다’는 표현은 향심기도 등을 실천해 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심상이 떠오르기 어려운 표현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명료해지기 보다는 어둠을 지나간다’는 등의 교부들의 기록들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유서 깊은 교회인 새문안 교회에서 ‘갈망의 새로운 수덕생활’을 접하게 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간 한국의 성공회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 오고 일구어 온 영적 유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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