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명상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머튼)

제주 피정을 다녀왔다. 성 이시돌 피정관에 비치되어 있는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볼펜과 노트를 사서 정성껏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들을 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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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목은 ‘What is Contemplation?’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이라고 번역하였다. 한자를 찾아 보니 ‘어두컴컴하다’는 뜻의 명(冥)자를 썼다. 감각에 연결된 피상적인 생각들을 가라앉히고 희미하고 깊은 생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명상’이라는 용어는 담고 있다.  성전(temple)은 ‘공개된 성별된 공간'(open or consecrated space)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이 하느님의 궁전(temple)에 하느님과 함께(con) 있는 것’이 contemplation이라’는 씨튼 수녀회 수녀님의 해석을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 영영사전을 보면 ‘무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 또는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여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고, 어원인 templum에 대하여는 ‘바라봄의 장소'(place for observation)라고 되어 있다. 이 단어 안에 이렇게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관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 세상

이 책은 이 신비적 명상이 ‘하느님께 거저받은 선물'(grate gratis data)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제일동인이시라는 점에서 주부적(注賦的, 쏟아 부어 주시는) 명상, 신비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은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수동적 명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이 이루어 낸 성취 또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머튼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한다.

그들은 정말로는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들 자신의 욕망, 그리고 문제거리, 안락, 즐거움과 그들의 모든 세상 관심거리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온 몸에다가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두르고는 지구 표면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명상과 성성(거룩함)의 씨앗은 그들의 영혼 안에 뿌려졌으나 그 씨앗들은 그저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 씨앗들은 싹이 트지를 않고 있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있다.

하느님은 이러한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니, 그들이 정말 깊은 열망으로 그분을 찾지 않는 까닭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 둘 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2. 영적 선물에 대한 열망

두번째 장에서 머튼은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 선물들을 열망하고 받게 되는가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세상의 일들과 물건들에 마음이 사로 잡혔던 사람이 영적 선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또한 그것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하여 그것에 대하여 알게 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귀 기울임과 바라봄과 순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발췌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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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세상’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사(일, 事)과 물(물건, 物)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가 성신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이 건네 올 것임에 틀림 없는 모든 만족과 이익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욕망을 잦아들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들은 저급한 사물들에다 그들의 정신을 다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영적인 선물들은 열망되지 않고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식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면 열망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적어도 그와 같은 일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없다면 분명 그러한 일치를 열망할 수 없다.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자기가 하는 활동과 일시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마저 스스로 내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명상의 기쁨에 대하여 무언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체험이다.

‘보고 맛들여라. 무릇 주님이 맛스러우심을.

그 맛스러움을 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14:23).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합당하게 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순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맛 볼 미각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뜻에 온전하고도 빈틈없이 양순히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명상이 되게끔 하는 하느님 사랑의 아주 극미한 움직임에 내맡겨 이끌려가는 섬세한 본능이다.

3. 능동적 명상

머튼은 이 책에서 수동적 명상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이 장에서는 능동적 명상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한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돕는 한에서 능동적인 명상의 부류에 속한다.

능동적인 명상에는 이제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 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wine and bread능동적 명상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례(예전)와 일상의 활동들을 예로 들고 있다.

전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들이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명상적이 되는데, 그 참여는 거룩한 미사(성찬례) 중에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부적 기도에 몰입하는 가장 평범한 길 중의 하나가 거룩한 친교(성체)로 주어지는 은총을 통하여 마련된다고 하는 사실에 조금도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활동 안에서 누리는 하느님과의 일치:  그리스도는 거룩한 삼위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비록 그들이 활동적인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이 행하고 고통받는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순명, 형제적 사랑, 자기 희생, 그리고 하느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김을 통하여 체득된 마음의 지극한 순수성으로 인하여 버금-명상가들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니, 외양으로나 좀 더 깊은 내적인 삶을 붙좇아 왔던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성성의 단계에 이르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을 바라며, 그리고 그분의 사랑만을 바라며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지 않을 재간이 없다.

4. 수동적(주부적) 명상

수동적 명상은 하느님께서 쏟아 부어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을 직관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엄밀한 말 뜻에서 볼 때,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데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 준다.

신비적 명상은 순수한 사랑에서 난 하느님에 대한 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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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도

‘그분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여 완성 그 자체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모든 사랑의 으뜸된 대상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하고 무사한(無邪, 간사함이 없는)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것만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기쁜이요, 모든 보상 중에서 최고의 보상일 수 있는 까닭에, 사랑한다는 바로 그 행위가 사랑에 대한 가장 탁월한 상급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 이외의 원인도 결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 결과요 그 자체 수단인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5. 어둠 속 빛살

머튼은 이러한 은총의 선물이 때로는 고통과 메마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내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외적인 것에 다시금 몰두하게 된다고 한다.

명상을 통하여 체험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혼에게 평안과 강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하나 때로 그 평안은 고통과 어둠과 메마름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리기도 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기운찬 힘은 때로 우리 자신이 극도의 무기력, 무능을 느끼게 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면서는 특히 그것이 그대에게 하느님에 대한 분명하고도 똑 부러진 어떤 인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햇빛이 병든 눈을 자극하듯 하느님의 빛은 저 영혼을 자극한다. 그 빛은 통고를 일으킨다.

주부적 명상 안에서 얻는 하느님 체험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상상해 왔던 일체의 것에 대한 전면적인 모순이다. 그분의 주부적 사랑의 불꽃은 인간적인 위안들에 연연해 하고 있는, 그리고 초보자였을 때에는 필요로 했었던 그런 빛과 느낌들을 그릇되이도 기도의 무슨 커다란 은총인 양 상상하면서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영혼의 자기애에다 가차없이 공격을 퍼 붓는다.

그렇게 되면 조만간에 주부적 명상은 영혼 안에 겁나리만큼 무서운 내적 변혁을 가져온다. 기도의 감미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묵상은 불가능해지고, 싫어지기조차 한다.

내적인 생활은 어둠과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 때가 기도 생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빛살이 너무 강렬하여 그들이 눈 멀어 버린 까닭에 그들에게 그 빛은 어둠 속 빛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처지에 저항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길 안내자이기를 원한다.

그들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심기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외적인 것들에다 자신을 몰아 붙인다.

6. 시험

머튼은 모든 어두움이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그러한 어둑한 가운데서 빛을 발한다고 말하였다.

일반 원리들은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유용하다.

묵상을 하는 도중에 겪는 건조함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분투하면서 느끼는 무력은 그 자체로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메마름과 무력은 죄나 불충실의 결과이거나, 혹은 단지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건강이 나쁜 데서 발생한 것일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괴로움 그 밑에서, 어둠의 장막 그 뒤에서, 고통 그 너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확실하고도 긍정적인 표지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 표지들은 그 시련들이 주부적 기도의 질서에 속하는 정화일 수 있게끔 해 줄 것이다.

(평안, 잠심 그리고 열망)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어둠 속으로 이끌려든 영혼이 거기에서 깊은 잠심을 찾아 얻고 세상과 물직적인 것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뒷전으로 잦아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 물론 흐트러짐이 있어, 영혼의 열망에 맞서서 끊임없이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 이 역시 주부적 기도를 드리는 증거가 될 것이다.

기쁨과 평안과 충만함은 오로지 메마름과 믿음의 이 고독한 밤 어딘가에서만이 찾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자라난다.

영혼은 어느 날, 이 어둠 속에서 그가 살아께신 하느님을 만나 뵈었다는 것을, 도대체가 기대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그분이 거기 계시고, 그기고 그분의 사랑이 사방팔방에서 자기를 에두르고 있고 자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에… 그 순간에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중요한 실재라고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어둠은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어둑한 그대로다. 하나 그것은 가장 밝은 한낮보다도 더 밝아진 것 같이 느껴진다.

비록 외적으로야 고통과 시련과 노고가 배가될지라도 그 영혼의 내적인 삶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것은 한 생각, 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 홀로만으로.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이니, 이 사랑은 성 베르나드도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다른 모든 활동을 자기 안으로 이끌어서 흡수해 버린다.

‘사랑은 그밖의 모든 것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열정을 사로잡는다.’

이 주부적 사랑은 그 모든 힘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들을 그분께로 들어 높인다. 그의 열망과 애착심을 점점 더 세상과 썩어 없어질 것들에서 떼어놓으면서 말이다.

7. 무엇을 할 것인가 – 십자가 성 요한의 가르침

머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정화하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권면한다.

st-john-of-the-cross1명상기도를 할 때 훌륭한 지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그대 영혼 안에서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모든 자연적인 확신에 관하여 그대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비워내는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실제 체험적으로 대면하는 문턱으로 그대를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대를 불명료한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 어스레하고 때로는 극고極苦를 일으키는 믿음의 빛의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가치를 배우라.

그대 삶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것은 어떤 것도 피하도록 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평안과 고요와 은거 안에 살라.

그리고 설령 하느님께 제아무리 커다란 영광을 드릴 것 같아 보이는 수고와 직분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휘둘려 그대의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들려는 그대의 열망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사심없는 사랑과 커다란 평안 속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들을 수행하라.

그대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잠심을 유지하라. 또한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부어 주시고 있는 단순한, 그리고 단순화하는 빛살을 누리며 거기서 쉬어라.

기도를 해 자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얼마나 진전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오직 한가지만을 찾아 구하라. 하느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을 더더욱 정화하는 것. 더욱 더 완전하게 그분의 뜻에다 그대 자신을 내맡겨 드리는 것. 보다 오롯하고 보다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보다 평안하게. 그리고 보다 온전하고 굽힘 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성성과 명상은 오로지 정화된 사랑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활동가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자기들의 외적인 업적들로 싸감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도록 하자.

만일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쏟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유일을 교회에 가져다 주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는 훨씬 더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한가지 일로 그들이 지금 수천가지 일들로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적은 수고로 이루어 낼 될 것이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이 순수한(신비로운) 사랑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하며 교회에 더 커다란 유익이 된다.

8. 정적주의의 위험

이 비움은 비움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한 것임을 머튼은 명확히 한다. 이 기도는 조용함과 마음의 고요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고 열망하는 기도인 것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창조된 사랑을 비워 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 맨 위로 곧장 내리 비춰지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의 정신에서 모든 창조된 형상들과 환영들을 몰아낸다.

반면에 정적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철저한 무화無化라는 거짓된 관념을 붙좇으면서 그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을 비워내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움직임도 없고, 생각도 없고, 지각도 없고, 사랑의 행동도 없고, 수동적인 감응도 없는, 게다가 내적인 삶의 빛이라든가, 다사로움, 생기, 어느 것 하나 없는 단지 공허만이 있을 따름인 어떤 영적인 진공속에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실상 참된 명상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 없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사실로 하여 고통을 겪는다.

사랑과 겸손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며 쓸쓸함과 고독과 메마름과 번뇌에 휩싸인 그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라. 고난의 밤에 그분께 대한 그대의 말 못할 그리움은 그대의 가장 감동 깊은 기도가 될 것이고 그대에게, 그리고 교회에 훨씬 더 값질 것이며, 지성이나 상상력이 가장 높은 자연적 단계에로 고양된 것보다도 더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첫 열매들을 맛본 그대여,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께 영광을 노래 불러 드려라.

그리고 그대 영혼 안에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 드려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빛으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시는 아버지시며, 사랑을 빚으시는 분이시여, 우리 영혼 안에 성령의 일곱 선물을 보내 주소서.

죄에서는 물론이고 지상에서 얻은 모든 덧엇는 지혜에서도 우리의 정신을 깨끗이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단순하고 참되이 당신의 지극한 성지聖志를 유순히 따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아드님 예수의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게 비추게 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하소서.

Veni Domine Jesu!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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